
'기획팀 팀장' 나부서.
직함은 거창했지만, 내 일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자리의 필수 아이템인 '아아' 빨대는 마를 날이 없었고, 내 모니터는 여전히 [레이드 현황]과 [AI 채팅창] 두 개가 양분하고 있었다.
"아... 편하다."
물론, '팀장'으로서의 소임은 다했다.
김 사장이 "음... 요즘엔 이런 '캠핑용 접이식 의자'가 잘 팔린다던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 30분 뒤 그의 메일함에는 '캠핑 의자 신규 PB상품 기획안.pdf' 파일이 꽂혀 있었다.
AI로 뽑아낸 '세상에 없는' 디자인 시안과, 마치 10년은 팔아본 듯한 '가짜' 상세 페이지, 그리고 '가짜' 마케팅 플랜까지.
김 사장은 이제 내가 만든 '가짜 기획안'을 들고 공장을 찾아다니는 게 일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질 제품'의 '완성된 미래'를 '미리' 기획하며 '아아'만 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 사장이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사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나 팀장!!!"
(아, 저 호칭... 아직도 적응 안 되네.)
"네, 사장님."
"일 냈네, 일 냈어! 자네가 기획한 그 '나부서's Pick 텀블러'! H백화점 MD랑 미팅이 잡혔어!"
"......네?"
'아아' 빨대를 씹을 뻔했다.
"자네 그 '가짜 상세 페이지', 내가 그냥 그 MD한테 메일로 툭 던져봤거든? 근데 반응이 폭발적이야! 당장 제안서 들고 브리핑하러 오래!"
김 사장은 내 어깨를 퍽퍽 쳤지만, 나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나 팀장."
"......"
"내일까지 H백화점 입점 '제안서' 하나만 멋지게 만들어줘!"
"...된장."
1화에서 증명사진이 없을 때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 터졌다. 제안서? 그게 뭐지? 먹는 건가?
나는 자리에 돌아와 '아아'를 잊은 채 마우스를 클릭했다.
구글 검색창에 [백화점 입점 제안서 양식]을 쳤다.
수십 개의 hwp 파일과 ppt 템플릿이 쏟아졌다.
[신입사원을 위한 완벽한 제안서 작성법]
[100억 매출을 부르는 기획서의 비밀]
"하..."
하나같이 10년은 된 듯한 촌스러운 디자인에, '당사의 비전', '시장 현황 분석', 'SWOT 분석'... 머리가 아파오는 단어들뿐이었다. 5분 만에 '삽질'임을 깨달았다.
'이걸... 언제 다 읽고 쓰지?'
그때, 모니터 한구석에서 깜빡이는 커서. 나의 '장난감'. LLM 채팅창.
'잠깐... 설마... 이것도...?'
나는 시험 삼아 '장난감'에게 말을 걸었다.
[LLM활용] [나: 야, AI. '사업 제안서'가 뭐야? H백화점 같은 곳에 입점하려면 뭘 써야 돼?]
[AI: 사업 제안서란... (중략) H백화점 입점을 위해서는 다음의 요소가 필수적입니다.]
[1. H백화점의 현황 및 주 고객층 분석]
[2. 자사 제품(텀블러)의 차별성 및 경쟁력]
[3. 입점 시 상호 시너지 효과 (Win-Win 전략)]
[4. 구체적인 마케팅 및 프로모션 계획...]
"........."
나보다... 나보다 100배는 똑똑했다. 나는 '아아'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았다. '게으른' 뇌가 '혁신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좋아. 뼈대는 네가 잡아. 살은 내가... 아니, 살도 네가 붙여.'
나는 제안서 템플릿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대신, 30분 동안 'H백화점'의 모든 것을 긁어모았다. 최근 1년간의 보도자료, 경쟁사 동향, 주력으로 미는 VIP 프로그램, 심지어 H백화점 회장의 신년사까지.
그리고 이 모든 '재료'를 요약해서 AI에게 던져 넣었다.
[LLM활용] [나: 지금부터 넌 'OO유통'의 '나부서 기획팀장'이다. 아래 요약된 H백화점 현황 데이터를 기반으로, '나부서's Pick 텀블러'가 H백화점의 'MZ세대 VIP 라운지 기프트' 및 '프리미엄 리빙관'에 얼마나 완벽하게 어울리는지에 대한, 존나게 설득력 있는 사업 제안서를 PPT 20장 분량으로 써줘. 당장 계약서에 도장 찍고 싶게 만들어. 메인 카피, 기대 효과, 예상 매출액까지 전부 포함해서.]
엔터.

내 모니터 위로, '제안서'라는 이름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장. H백화점의 'Next Luxury' 전략과 '나부서's Pick'의 조우]
[2장. 데이터로 보는 2030 여성 VIP의 니즈: '가심비'와 '프리미엄']
[...15장. 분기별 VVIP 기프트 제안: '시그니처 컬러' 에디션]
[...20장. 상호 Win-Win을 통한 300% 매출 성장 시뮬레이션]
"와... 미친..."
내가 H백화점 MD라도 당장 도장을 찍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사장실. 김 사장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고, 나는 '아아'를 빨며 여유롭게 노트북을 열었다.
AI가 만들어준 완벽한 PPT. 폰트, 디자인, 그래프까지... 10년 차 기획 이사가 만들었대도 믿을 퀄리티였다.
"그럼...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아아'를 한 모금 빨고, AI가 써준 'A+' 답안지를 침착하게 읽어 내려갔다.
"첫째, H백화점의 주 고객층인 2030 여성의 구매력은... (중략) ...이에 저희 텀블러의 '무광 파스텔톤' 디자인은 완벽한 소구점을 가집니다."
"둘째, '가짜 상세 페이지'로 이미 검증된 클릭률 데이터... (중략) ...이는 초기 마케팅 실패 리스크 '제로'를 의미합니다."

내 브리핑이 20장을 모두 넘어갔을 때. 사장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사장님?"
고개를 돌려본 김 사장은... 울고 있었다.
"흐... 흐읍..."
"사장님? 왜... 우십니까?"
김 사장이 눈물을 훔치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 팀장... 자네... 자네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가... 자네가 우리 회사를 살렸어! 우리가... 우리가 백화점에 반드시 들어갈꺼야! 이 제안서... 이건... 이건...!"
(나는 그냥 '복사/붙여넣기'를 했을 뿐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은 '아아'를 조용히 마셨다.
창밖으로, 'OO유통'의 미래가 H백화점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부서 따라하기
멋진 제안서를 LLM으로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