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백화점 입점 제안서가 '대박'을 친 후, 사장님은 구름 위를 걷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딱 3일 갔다.
"나... 나 팀장!!!! 큰일 났어!!!"
사장실 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김 사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나왔다. 나는 평온하게 '아아' 빨대를 물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사장님. 또 재고 빵꾸났습니까?"
"아니야! H백화점 MD가... 그 양반이... 욕심을 부려!"
사장의 말인즉슨 이러했다. 내 '가짜 기획안'과 '제안서'에 홀딱 반한 백화점 MD가, 기왕 런칭하는 거 백화점 1층 로비 대형 스크린에 띄울 '브랜드 홍보 영상'을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일 모레까지!!!"
김 사장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영상이라니! 영상이라니!! 촬영팀 섭외하고, 모델 부르고, 편집하고... 그거 최소 2주에, 비용은 천만 원이 넘어! 우리 예산 다 썼잖아!"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장례식장이 되었다. 김 대리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영상은... 무리죠. 그냥 사진 슬라이드로 때우자고 할까요?"
다들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아아' 얼음을 굴리며 생각했다.
'영상? 귀찮게 뭘 촬영을 해.'

요즘 내가 새로 파고 있는 '장난감'이 하나 있었다. 구글에서 만든 동영상 생성 AI, 'Veo3'.
이 녀석의 성능은... 괴물이었다.
이미지 한 장만 던져주면, 그걸 지지고 볶아서 영화를 만들어준다.
나는 사장님을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사장님. 영상 그거, 뭐... 제가 한번 해보죠."
"자네가? 자네 영상 편집도 할 줄 아나? 프리미어 프로? 애프터 이펙트?" "아뇨. 그런 거 무거워서 안 깝니다."
"그럼 뭘로...?" "그냥... '딸깍'으로요."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모니터 화면을 전환했다.
화면엔 지난번 AI로 만들었던 우리의 가상 모델 '지나'가 텀블러를 들고 있는 고화질 이미지가 띄워져 있었다.
"자, 지나 씨. 이제 움직여 볼까?"
나는 Veo3 입력창을 열었다. 이미지를 업로드하고, 프롬프트 창에 손을 올렸다.
이번 컨셉은 백화점 1층에 걸릴 영상이니,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압도적인 '포스'가 필요했다. 마치 패션쇼 런웨이처럼.
[LLM/Veo 활용] [나: (이미지 첨부) Cinematic, slow-motion. High fashion runway show. A confident female model walking towards the camera holding a tumbler. Flashbulbs exploding, dark moody lighting, 8k resolution. Make it look like a luxury brand commercial.] (해석: 시네마틱, 슬로우 모션. 하이 패션 런웨이 쇼. 텀블러를 든 자신감 넘치는 모델이 카메라를 향해 걸어옴. 플래시 터지고, 어둡고 분위기 있는 조명. 명품 브랜드 광고처럼 만들어.)
딸깍.
[Generating Video...]
게이지가 차오르는 동안 나는 남은 '아아'를 쪽쪽 빨았다. 약 2분 뒤.
"오..."

모니터 속에 기적이 일어났다. 정지해 있던 '지나'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또각또각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파바박-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그녀가 든 텀블러는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옷감의 질감, 흔들리는 귀걸이, 도도한 표정까지.
이건 그냥... 파리 패션위크였다.
"좀 짧은데? 하나 더."
[LLM/Veo 활용] 이번엔 야외 버전. [나: (이미지 첨부) Sunny Paris street cafe. Model drinking coffee from the tumbler. Wind blowing gently through hair. Handheld camera movement. Natural light.] (해석: 햇살 좋은 파리의 거리 카페. 텀블러로 커피를 마시는 모델.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부는 바람. 핸드헬드 카메라 무빙. 자연광.)
두 번째 영상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이 영상 두 개를 이어 붙이고, 배경음악으로 저작권 없는 힙한 비트를 깔았다. 작업 시간? 총 20분.
"사장님."
나는 USB를 들고 다시 사장실로 갔다. 사장님은 아직도 렌탈 스튜디오 전화번호를 찾으며 끙끙대고 있었다.
"어, 나 팀장. 안 그래도 지금 촬영 감독님한테 사정해보고 있는데..." "그거 끊으십쇼. 다 됐습니다."
"응? 뭐가?" "영상이요."
나는 사장실 대형 TV에 USB를 꽂았다.
[재생]
둥- 둥- 둥- (비트감 넘치는 BGM)
화면 가득,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텀블러를 든 모델이 런웨이를 걸어 나왔다. 슬로우 모션으로 텀블러 로고가 클로즈업되는 순간, 사장님이 들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렸다.
"어... 어...?"
화면이 전환되고, 파리의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이어졌다.
마지막엔 [Nabusor's Pick x H Department Store] 로고가 페이드 아웃.
영상이 끝나고, 사장실엔 정적만이 흘렀다.
김 사장은 입을 떡 벌린 채, TV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 나 팀장..." "네." "이거... 누구야? 이 모델... 섭외했어? 언제? 비행기 타고 파리 갔어?"
"아뇨. 그냥 제 자리에서 만들었는데요."
"그게... 말이 돼? 이 퀄리티가? 이게 헐리우드 영화지, 어떻게..."

김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이번엔 눈물이 아니라, 거의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이었다.
"자네... 정체가 뭐야? 혹시... 미래에서 왔나?"
나는 피식 웃으며 빈 컵을 흔들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미래는 무슨. 그냥... '툴' 좀 잘 다루는 백수 출신입니다."
사장님은 그 영상을 당장 MD에게 보냈다. 10분 뒤, MD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영상 뭡니까! 대박입니다! 당장 1층 메인 전광판에 겁시다! 이거 브랜드 품격이 확 사는데요?!]
김 사장은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이글거렸다.
"나 팀장." "네." "자네, 컴퓨터 바꿔. 제일 비싼 걸로. 그리고 의자도 바꿔! 눕혀지는 걸로!"
"오."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역시, 몸이 편하려면 머리가(혹은 AI가) 고생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게으른 철학'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 영상 하나가... 백화점 로비에 걸리는 순간, 더 귀찮은 일들을 몰고 오게 될 줄은.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