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의 요술램프' 덕분에 단순 노가다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 팀장! 텀블러 디자인 좀 더 내봐! 이번엔 겨울 한정판으로!"
"나 팀장! 크리스마스 기획 상품은 아직이야? 공장 돌리려면 오늘 넘기면 안 돼!"
생산 속도가 빨라지니, 기획 속도도 빨라져야 했다. 문제는 내 머리가 '무한 리필'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텅 빈 모니터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얬다. 파스텔톤? 무광? 이제 그런 건 다 써먹었다.
더 이상 나올 아이디어가 없었다. 창작의 샘이 말라버린 것이다.
"아... 뇌 빼고 일하고 싶다."
'아아'를 빨 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겨울... 텀블러... 진부하다. 루돌프라도 그려 넣어야 하나? 촌스럽게?
그때, 내 머릿속에 또 다른 '장난감'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구글 I/O 영상에서 봤던 그 녀석. 서로 다른 이미지를 섞어서 새로운 컨셉을 만들어주는 'Mixboard'.

"그래... 내가 그릴 필요 없지. 있는 거 섞으면 그게 창작이지."
나는 썩은 동태눈에서 다시 생태눈으로 돌아와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화면 가득 하얀 캔버스(보드)가 펼쳐졌다.
나는 인터넷 창을 띄워 재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의 베스트셀러 '나부서's Pick 텀블러' 기본 형태.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북유럽 니트 스웨터' 질감 이미지.
차가운 금속 느낌의 '사이버펑크' 네온 사인 이미지.
크리스마스 '스노우볼' 이미지.
"자, 이제 쉐킷쉐킷 해볼까."
[LLM/Mixboard 활용] 나는 캔버스 위에 수집한 이미지들을 툭툭 던져 놨다. 그리고 '텀블러' 이미지 위에 '니트 스웨터' 이미지를 드래그해서 겹쳤다.
[Blending...]
스르륵. 화면 속에서 매끈하던 텀블러 표면이 순식간에 포근한 '털실 짜임' 질감으로 변했다. 단순히 그림을 입힌 게 아니었다.
실제 털실로 짠 듯한 입체감이 살아있었다. 색상은 톤 다운된 딥 레드와 포레스트 그린.

"오... '어글리 스웨터' 에디션? 이거 힙한데?"
자신감이 붙었다. 이번엔 좀 더 과감하게 섞어보자.
나는 '텀블러 뚜껑' 부분만 선택해서, 그 위에 '스노우볼' 이미지를 믹스했다.
[Merging Concepts...]
팟- 결과물은 충격적이었다. 텀블러 뚜껑이 투명한 돔 형태로 바뀌더니, 그 안에 미세한 하얀 가루들이 흩날리는 '스노우볼 뚜껑'이 탄생했다. 흔들면 눈이 내리는 텀블러라니.

"이건... 미쳤다."
마지막으로 '사이버펑크' 이미지를 섞어 만든 '홀로그램 실버 에디션'까지. 단 10분 만에, 세상에 없던 디자인 시안 3종이 완성됐다.
[Cozy Knit] 실제 니트 질감의 따뜻한 감성 텀블러
[White Snow] 뚜껑에 스노우볼이 달린 환상적인 텀블러
[Cyber Xmas] 조명에 따라 색이 변하는 홀로그램 텀블러
나는 이 시안들을 출력해서(이번엔 일부러 종이로 뽑았다. 뽀대 나게.)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님은 달력을 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나 팀장... 오늘 넘기면 진짜 늦어... 이번 크리스마스 대목 놓치면..."
"사장님. 골라보시죠."
나는 테이블 위에 시안 3장을 화투패 던지듯 촥, 촥, 촥 깔았다.
"이게... 뭔가?"
사장님이 첫 번째 '니트 텀블러' 사진을 집어 들었다.
"아니... 텀블러에 옷을 입혔어? 질감이... 사진만 봐도 따뜻해 보이네?"
두 번째 '스노우볼 텀블러'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뚜껑에... 눈이 와? 기술적으로 이게 가능해?"
"공장에 물어보니까 이중 사출하면 된답니다. 단가만 좀 맞추면요."
(물론 이것도 AI한테 물어본 거다.)
"그리고 마지막, 홀로그램. 이건 젊은 애들이 환장할 겁니다."
사장님은 세 장의 시안을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선택 장애가 온 것이다. 다 너무 좋아서.
"나 팀장... 자네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환생한 건가?"
"아뇨. 그냥... 짬뽕을 좋아해서요." (섞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좋아! 세 개 다 진행해!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컬렉션'으로 묶어서 다 출시한다!"
"세 개 다요?"
일이 세 배로 늘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었다.
"공장 섭외는 내가 할 테니까, 자네는 상세 페이지만 준비해! 이번에도 'Mixboard'인가 뭔가 하는 그 친구랑 같이!"
사장님은 시안을 품에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텅 빈 사장실에 서서 뒷목을 긁적였다.
"뭐... 상세 페이지야 '요술램프'가 해주겠지."
디자인 고갈? 아이디어 가뭄? 그런 건 내 사전에 없다. 세상에 널린 게 아이디어고, 나에겐 그걸 '맛있게 비벼줄' 도구가 있으니까.
나는 자리로 돌아와, 승리의 의미로 얼음만 남은 컵에 새 '아아'를 가득 채웠다.
이번 겨울도, 따뜻하게(돈방석 위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