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1

"살려주세요..."

내 입에서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믹스보드'로 만든 크리스마스 텀블러가 소위 '대박'을 터뜨린 후, 내 인생은 끝났다.

"나 팀장! 신년 기획안은?"

"나부서 님, 저번에 만든 영상 반응 좋은데, 설날 버전도 미리미리..."

"팀장님! 공장에서 디자인 수정 요청 들어왔는데요!"

기획팀장(팀원 없음) 나부서의 자리는 이제 '민원 처리실'이 되었다. '아아'의 얼음이 녹을 새도 없이 일감이 쏟아졌다.

내 소중한 레이드 시간은커녕,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했다.

'아... 때려치울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퇴직금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아직 벤츠는커녕 모닝도 일시불로 못 산다. 무엇보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 내 '게으른 천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너질 나부서가 아니지."

그때였다. 김 사장이 산더미 같은 서류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나 팀장! 자네 진짜 천재야! 텀블러가 아주 날개 돋친 듯 팔려!"

"네네, 감사합니다. (제발 저리 가세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이참에 우리 회사 '업무 매뉴얼'이랑 '사규'도 좀 만들어봐."

"......네?"

이미지 2

나는 마시던 '아아'를 뿜을 뻔했다.

사규? 업무 매뉴얼? 그건 인사팀이나 총무팀이 하는 거잖아! (물론 우리 회사엔 그런 팀이 없다.)

"아니, 회사가 커지니까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안 되겠더라고. 근로기준법도 좀 찾아보고, 경쟁사들은 어떻게 하는지 조사도 좀 하고... 자네 정리 잘하잖아! 엣헴!"

김 사장은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이건 지금까지 해왔던 '이미지 생성'이나 '글짓기'랑은 차원이 달랐다.

팩트 체크가 필요하고, 법률 용어가 난무하며, 수백 페이지의 문서를 읽고 정리해야 하는... 진짜배기 '핵노가다'였다.

"하... 이걸 혼자 다 하라고?"

'아아'를 원샷했다.

머리가 띵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이 수많은 문서를 다 읽다간 과로사로 요절할 게 뻔했다.

'읽는 건... 내가 안 한다.' '정리도... 내가 안 한다.'

내 뇌리를 스치는 새로운 '장난감'. 그래, 구글이 최근에 내놓은 그 괴물 같은 녀석이 있었지.

'NotebookLM'.

이 녀석은 단순한 챗봇이 아니다.

내가 자료를 때려 넣으면, 그 자료만 가지고 학습해서 나만의 '맞춤형 AI 비서'가 되어주는 녀석이다.

이미지 3

"좋아. 오늘부터 네가 내 '법무팀'이자 '인사팀'이다."

나는 NotebookLM을 켰다. 텅 빈 '노트북'이 나를 반겼다.

이제부터 '자료 투하' 시간이다.

[문서 업로드]: 고용노동부에서 다운받은 '표준취업규칙 가이드라인.pdf' (200페이지 분량), 김 사장이 던져주고 간 두서없는 '회사 운영 방침.docx'.

[웹사이트 링크]: 경쟁사 채용 페이지의 '복리후생' 탭 URL 5개, 최신 근로기준법 개정안 해설 블로그 링크 3개.

[텍스트 붙여넣기]: 사장님이 카톡으로 보낸 "우리 회사는 자율성을 중시하되 책임은..." 어쩌고 하는 장문의 잔소리 복사본.

"자, 다 먹었지? 이제 소화시켜."

NotebookLM이 자료를 분석하는 동안,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이게 진정한 효율이지.) 10분 후.

[분석 완료. 5개의 소스를 기반으로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풀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LLM/NotebookLM 활용]

명령 1: 핵심 요약 보고서 [나: 업로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리 회사가 당장 도입해야 할 '필수 업무 규칙' 10가지를 A4 1장 분량의 보고서 형태로 요약해 줘. 특히 법적 의무 사항은 꼭 포함하고.]

타다닥. 순식간에 근로기준법과 사장님의 니즈가 절묘하게 섞인, 완벽한 '업무 규칙 요약본'이 튀어나왔다. 내가 읽었으면 3박 4일 걸렸을 내용이었다.

명령 2: 직원용 FAQ (인포그래픽 기초자료) [나: 좋아. 이번엔 신입사원들이 자주 물어볼 만한 '휴가/복지 규정 FAQ'를 만들어줘. 딱딱하지 않게, Q&A 형식으로 정리해.]

Q. 연차는 어떻게 쓰나요? A. (관련 법령 및 사규 근거) ...자유롭게 사용 가능하며, 전자결재 시스템을 통해...

완벽했다. 이 텍스트를 그대로 디자이너(물론 AI)에게 넘기면 인포그래픽이 뚝딱이다.

명령 3: 프로세스 다이어그램 (구조화) [나: 마지막으로, '지출 결의 및 승인 프로세스'를 단계별로 정리해 줘. 누가 기안하고, 누가 승인하는지 명확하게. 이걸로 플로우차트 그릴 거니까 구조화해서 내놔.]

이미지 4

NotebookLM은 복잡한 규정들을 분석해서, [기안자 작성] -> [팀장 승인] -> [대표이사 결재] -> [회계팀 처리]라는 명확한 단계를 뽑아냈다.

"크크크... 이거 물건이네."

나는 NotebookLM이 토해낸 자료들을 '복사/붙여넣기'해서 그럴싸한 표지를 덮었다.

[주식회사 OO유통 업무 규정 및 매뉴얼 (Ver 1.0)]

기획/작성: 기획팀장 나부서

다음 날 아침. 사장실 책상 위에 두툼한 제본 책자가 놓였다.

"사장님. 요청하신 사규집입니다."

김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책자를 넘겼다. 법적 근거가 명시된 조항들, 깔끔하게 정리된 도표, 한눈에 들어오는 프로세스까지.

"이걸... 자네가 다...? 밤새워서?"

(아뇨, AI가 밤새웠는데요.)

"나 팀장... 자네는 기획만 잘하는 게 아니었어... 행정의 신이야!"

이미지 5

김 사장의 눈빛이 또 한 번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귀찮은 규정 질문이 들어오면?

"아, 그거 '나부서 매뉴얼' 34페이지 참조하세요."

한마디면 끝이다.

일이 몰린다?

더 많은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하면 된다.

나에겐 지치지 않는, 그리고 월급도 안 받는 최고의 비서들이 있으니까.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아아'를 쭉 들이켰다. 오늘도 나의 '게으른 완벽주의'는 승리했다.


네이버 원문 보기